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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깨우쳐주신 선생님 - 유미경 광양문협회장

생활의 향기
유미경 한국문인협회 광양시지부장

2019년 05월 10일(금) 18:36 [광양신문]

 

ⓒ 광양신문


"자, 나온다, 나와. 오늘은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요놈들 먼저 나오려고 싸우고 야단들이네. 옛다, 오늘은 네가 나와라."

선생님께서는 바지 앞에 달린 작은 주머니 속으로 넣으셨던 엄지와 검지를 마주잡고 허공으로 번쩍 치켜들면서 외치셨다. 126개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모두 그 손가락 끝으로 향했고, 마술을 부리는 것 같은 선생님의 모습에 숨을 죽였다.

"옳지, 오늘은 심청이가 나왔구나."

그 때부터 교실 안은 꽃잎이 열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하지만 난 선생님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미움과 원망의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4학년이 된 첫날 새 담임이 되신 선생님의 말씀은 어린 내게 너무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미경, 넌 부반장을 했으면 다른 사람보다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하품을 해? 그것도 전교조회 시간에 말이야. 그런 사람은 부반장이 될 자격이 없어."

그 한 마디가 곧이어 시작된 부반장 선거에서(그 당시 여자는 반장이 될 수 없었다) 내가 떨어지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랬기에 선생님의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빠져들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미움과 질투도 함께 쌓여 갔던 것이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지혜와 슬기를 담은 선인들의 이야기와, 신비롭고 아름다운 전래동화는 어린 우리들의 혼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공부보다는 농사일과 집안일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겨야만 했던 시골 빈농의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이야기는 신의 말씀과도 같았다.

고난을 이겨내고 우뚝 선 위인들과 영웅들의 일대기는 더없이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우리도 어른이 되면 그들과 같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게 해주었다.

그 때부터 나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운 선생님이, 또 나를 미워하는 선생님이 내가 모르는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묘한 자극제가 되었다.

나도 선생님만큼 많은 이야기들을 알아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들려주고 싶었다.

당시 우리 학교 도서실에는 1000여권이 채 안 되는 책이 있었는데, 나는 그 책들을 다 읽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하루에 서너 권씩 빌려서 밤을 새워가며 읽기 시작했다.

잠들면 불이 난다고 어머니께서 혼을 내시면, 남포등 불빛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새벽이 될 때까지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4학년이 끝나기 전에 나는 그 책을 모두 읽어버렸다. 그 때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시기였다. 그것은 내가 문학의 길을 걷게 된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 당시엔 선생님이 정말 밉고 싫었다. 공부부터 시작해서 노래든 그림이든 체육이든 그 어떤 것 하나라도 남에게 지기 싫어했고, 3년 동안이나 부반장을 했는데, 선생님의 한 마디 때문에 부반장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선생님을 향한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던 그해 일요일 어느 날, 난 불의의 사고로 오른 손을 크게 다쳐 열다섯 바늘이나 꿰매는 수술을 하게 되었다. 말이 수술이지 병원이나 의료시설도 없는 시골마을에 전문의가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차도 없었던 그 시절에 손바닥의 살들이 손가락 사이로 터져 나와 내장처럼 흔들거리는 손을 들고 20리나 되는 길을 걸어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내 손을 들고 동동거리던 엄마는 동네 약방 주인에게로 달려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군 시절 위생병을 지냈다는 약방 주인은 내 손을 보더니 곧바로 수술을 시작했다. 기름과 모래로 범벅이 된 살들을 잘라내고 꿰매는 시술이 마취주사도 없이 이루어졌는데, 동네 소문이 날 정도로 엄살이 심했던 나였지만 입을 앙다물고 30여분도 넘는 그 수술을 묵묵히 견뎌내었다.

그것은 내 사고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오신 선생님께서 수술이 다 끝날 때까지 내 왼손을 잡고 용기를 북돋아주셨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참아, 이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니야. 넌 이런 것쯤은 충분이 이겨낼 수 있는 용기 있는 아이야."

그런 선생님 앞에서 울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그 후로 한 달이 넘도록 나는 오른손을 쓰지 못했고, 상처가 아문 뒤에도 후유증이 커서 글씨를 쓸 수가 없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왼손으로 힘겹게 글씨를 쓰는 내 곁에 다가오셔서 필기를 대신해주셨다.

미술 시간에도 울면서 책상에 엎드려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힘이 없어 늘어져 있는 내 손을 잡고 함께 그림을 그려 주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수술할 때 신경을 잘못 건드려서 손을 쓸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이 진단이 내려졌다고 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한학기가 다 가도록 손을 움직일 수 있는 훈련을 시켜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 때문에 부반장 못되었다고 아직 원망하고 있지? 그건 네 버릇도 고쳐주고, 좀더 여자다운 아이로 자라나주길 바래서 그랬던 거야. 우리 앞으로 좀 친해보자."

전 해에 우리 학교에 부임해 오신 선생님은 내가 한 마리 야생마처럼 날뛰며, 내 위엔 아무도 있을 수 없다는 모순된 생각을 가진 버릇없는 아이라는 것을 간파하셨던 것이다. 그 후 선생님의 의도대로 난 온순한 양이 되었다.

여자 아이들과 고무줄놀이를 하기 보다는 남자아이들과 구슬치기 딱지놀이를 즐겨하고, 말 타기와 자치기를 더 좋아하는 선머슴아이 같았던 시골 계집아이를 선생님께서는 문학이라는 거대한 바다 속으로 빠져들게 하셨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선생님의 이마 위에 난 생채기까지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 후로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선생님도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하지만 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빛내며 바라보던 친구들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들도 남김없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하늘나라에서도 아이들을 모아 놓고 짓궂은 미소를 지으시며 이야기 주머니를 열고 계실 것이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사제 간의 정마저 메말랐다고 하지만, 마지막까지 남아서 이 세상의 찬란한 횃불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제자들과 선생님들의 참된 사랑이 아닐까.

이 아름다운 오월,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숲 속을 배회하듯 오늘 하루만이라도 선생님의 그 은혜에 흠뻑 젖어 하루를 보내고 싶다.

광양뉴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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